습관에서 벗어나기               (제민일보.08년 08월26일)




요즈음 쉽고도 어려운 일을 하는 것으로 하루가 재미있다. 나이에 맞지 않게 그림책을 보는 일이다. 그림이 대부분을 차지하는 책이라 유아들이 보는 책이라고 생각 할지 모르겠지만 나에게는 보면 볼수록 어렵고 수수께끼 같은 요상한(?) 책이니 시간이 갈수록 마음을 뺏기고 있다. 그림책에 한번 빠져본 분들은 알겠지만 그림책의 세계는 무궁무진하고 잘된 그림책 일수록 더 많은 이야깃거리를 준다.

책에서 글과 그림이 함께 있을 때 글을 아는 어른들은 습관적으로 글을 먼저 읽고 그림은 대충 훑어보고 지나간다. 그러나 글을 모르는 아이들은 글에는 눈길도 안주고 그림 장면 하나하나에 무한한 상상력을 발휘하며 자기 나름대로의 이야기들을 지어낸다. 그건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저절로 되는 일이다. 그리고 친구들에게, 어른들에게 종알종알 재미난 이야기들을 전해준다.

어차피 관습에 젖어있는 나 스스로도 그림책이 주는 매력에 빠져 본다고 의식적으로 글은 안보고 그림만 보려고 무던히도 애써보았다. 그러나 매번 실패다. 습관의 무서움을 다시 한번 느껴보는 것이다.

이런 와중에 지금까지 노력의 산물인지 우연인지 모르겠지만 마음이 짠해지는 그림책을 하나 발견하게 되었다. 바로 글 없는 그림책 '도착 (숀텐. 사계절)' 이다. 작가는 책 설명서에 '글은 우리의 주위를 끄는 놀라운 힘을 가지고 있고, 글이 없을 때 하나의 이미지는 더 여유 있는 개념적 공간을 가질 수도 있고, 독자의 관심을 더 오래 머물게 할 수 있다. 글이 있다면 독자는 가장 손쉽게 볼 수 있는 설명글에 의해 상상력을 지배당할 수도 있다'라고 말하고 있다. 정말 공감하는 말이다.

글을 읽지 않고도 감동과 재미와 마음이 짠해짐을 느낄 수 있는 그런 혜택들을 아이들이 누리고 있다고 생각하니 부럽기만 하다. 우리 어른들이 하고 싶어도 좀처럼 하지 못하는 즐겁고 신나는 그들만의 세계를 인정해주고 격려해주는 용기가 필요한 때인 것 같다.

우리들은 살아가면서 익숙해져있는 습관에 젖어 더 소중하고 아름다운 것들을 알지 못하고 살아간다. 한번쯤은 원칙을 무시하고 파격적인 역발상과 어린이 같은 상상력으로 모든 사물과 세상사를 바라보는 것도 바쁘게 사는 우리 어른들에게 필요한 일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임기수 (설문대어린이도서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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