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아! 이것이 우리 학교란다 (제민일보. 07년 10월02일)



작년 9월 일본에 다녀온 후 나는 한동안 가슴이 두근거리는 병을 앓았다. 일본에서 우리말과 글로 교육과정을 이끌고 있는 민족학교를 다녀온 후의 일이었다. “뜨겁습니다”란 이름을 내건 젊은이들이 일본에 있는 우리 동포들에게 우리책 보내기 운동과 교류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는 것도 큰 충격이었으며, 내가 직접 그 학교에 가서 수업을 진행하게 된 일도 큰 충격이었다.

올해 ‘우리학교’란 영화가 상영되면서 일본 내 민족학교는 더욱더 많은 이들에게 알려지게 되었다. 나는 그 영화를 두 번씩이나 보면서 참 많이 반갑고 참 많이 슬펐다. 나의 충격을 많은 이들과 함께 나눌 수 있음이 반가움이었고, 함께 영화를 본 아들의 질문에 속 시원히 답할 수 없음이 슬픔이었다. “아빠, 왜 저렇게 힘들게 우리 말로 공부하는거? 편안히 일본 학교 다니면 되지.”

9월 12일 나고야행 비행기에 오르면서 이번 방문에서는 꼭 그 답을 찾아내고 싶었다. 우리 일행이 찾아 간 곳은 나고야 공항에서 두시간 반정도 걸리는 중소도시 시즈오까에 있는 시즈오까 초.중급학교이다. 60년 가까운 전통을 가지고 전교생이 2,000명 가까이 되었던 학교가 지금은 전교생이 30명 남짓밖에 안된다. 작년에는 1학년이던 두 명이 우리 일행을 알아보고 반갑게 웃어준다. 그러나 올해 1학년엔 이름이 한 명도 없었다.

일본 정부로부터는 정식 학교 인가도 받지 못하였으며, 다른 학교보다 수업료도 많이 내어야 하는 조선학교를 보낼 수 있는 부모가 점점 줄어들고 있는 현실. 흔히 재일 조선인들에게는 3개의 조국이 있다고한다. 태어난 일본, 대다수 할아버지,할머니들의 고향인 남한, 그리고 정신적 고향인 북한. 한반도가 분단된 후 재일 조선인들은 민족학교를 설립하게 되고, 남한과 북한에 자금 지원을 요청했다. 그 때 손을 내민 것은 북한이었다. 이때부터 민족학교와 북한이 친밀한 관계를 맺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북한도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기에 민족학교에 대한 지원을 줄이게 되고, 그에따라 학부모들의 경제적 부담은 늘어나는 현실이었다.

아이들과 같이 송편을 만들고, 노래 부르고, 웃고 떠들면서 맑디 맑은 눈동자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느낌을 받았다. 더 잘 살기 위한 출세와 경쟁을 접고 자신의 참 모습을 스스로 찾아나가는 교육을 받고 있는 아이들의 살아있는 눈동자는 강렬하였다. 무언가를 상실했던 경험을 결코 잊지 않고 지켜내려는 의지가 저 아이들의 눈동자 속으로도 전해졌음이 틀림없다. 어쩌면 우리는 우리다운 것들을 너무 쉽게 포기하고, 너무 쉽게 잊어버리고 있다는 반성이 통증이 되어 가슴을 치고 올라왔다. 민족학교를 졸업한 저 아이들이 요즘시대의 성공과 처세의 승리자가 되지는 못할지라도 다시 이 학교로 돌아와 후배와 후손을 위해 자신과 아비들의 삶을 살아있는 목소리로 전해줄 일꾼이 되리란 생각에 왠지 목이 메어왔다.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나는 아들의 질문에 답할 충분한 대답을 찾지는 못하였으나 내 머릿속에는 이 구절이 떠나지 않았다.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흔들리지 않고, 샘이 깊은 물은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다.” 아직 어린 아들은 이 말의 의미를 다시금 물어오겠지...이 의문을 가슴 속에서 되새김질 해 볼 수 있는 것 역시 자신의 뿌리와 정체성을 찾기 위한 노력이며 그것이 곧 자기사랑으로 이어진다는 걸 깨닫게 되겠지. 제주공항, 낯익은 이 고향의 색깔과 바람과 공기, 그 속에서 민족학교 아이들과 함께 부르던 노래가 흘러 나오는 듯하였다.  


 비오는 날엔 비가, 눈 내리는 날엔 눈이/ 때 아닌 모진 바람도, 창을 들이쳐/너희들의 책을 적시고, 뺨을 때리고 할퀴고/공부까지 못 하게 만들어도/아이들아 이것이 우리학교란다/초라하지만 단 하나뿐인 우리의 학교/아이들아 이것이 우리 학교란다./니혼노 각코오 요리 이이데스.(일본학교 보다 좋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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