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양의 아이>
5월 14일
작가 :하이타니 겐지로
어린이와 문학을 빼고서는 하이타니 겐지로를 이야기 할 수 없다. 가난한 어린 시절, 작가를 꿈꾸던 하이타니는 교사가 되었다. 교사시절 만난 아이들이 그의 삶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말 그대로 ‘아이들에게 배운’ 것이다. 아이들의 글을 엮어 <<선생님, 내 부하가 되라>> 라는 책을 펴냈다. “내가 어떤 글을 쓰더라도 그 뿌리는 이 책에 있을 겁니다”라고 작가가 말했듯, ‘그가 만난 어린이야말로 그에게 있어 문학의 원천이다.
하이타니의 첫 소설 <<나는 선생님이 좋아요>> (원제:토끼의 눈)는, 지금까지 수백만명이 넘는 독자들에게 사랑을 받고 있으며, 일본 문학계에 숱한 논쟁을 불러 일으킨 주범으로, 수 많은 모방작과 비판작을 낳게 한 문제작이다. 이 책을 빼놓고는 일본 문학사를 이야기할 수 없다는 것도 이런 사정 때문이다.
이 소설의 배경이 되는 오키나와의 역사 관련도서
류큐왕국[琉球王國(유구왕국) ] 일본 오키나와현에 있었던 왕국의 이름.
<오키나와의 눈물>
메도루마 슌 지음·안행순 옮김 | 논형
많은 한국인에게 오키나와는 ‘일본의 하와이’로 불리는 휴양지다. 야구팬들이라면 프로야구단이 겨울철 전지훈련을 자주 가는 곳으로 알고 있을 듯하다. 일본 문화에 관심 있는 이들에게는 가수 아무로 나미에 같은 유명 연예인을 많이 배출하는 곳으로, 혹은 일본 영화나 문학 작품 속에 종종 등장하는 도피처 혹은 이상향 이미지를 간직한 장소로 다가올 것이다.
그런데 일본에서 오키나와가 차지하는 위상은 그보다 훨씬 복잡하다. 지금 제주도는 신혼여행객 혹은 중국인들이 좋아하는 관광지로 유명하지만, 실은 조선시대의 유배지나 4·3 항쟁의 비극이 서린 곳이기도 한 사연과 비슷하다고 할까.
‘오키나와 전투’ 60주년인 2005년 일본에서 나온 <오키나와의 눈물>에서 메도루마 슌은 가족의 체험담과 여러 각도로 취재한 역사적 사실을 통해 오키나와의 비극적 역사와 암울한 현실을 드러낸다.
일본은 2차대전의 당사자였지만, ‘본토’에서는 어떠한 지상전도 벌어지지 않았다. 전쟁의 패색이 짙어가던 1945년 초, 일본군은 오키나와에 10만여 수비군을 배치했다. 이들의 임무는 ‘지구전’을 치르고서라도 미군의 전진을 막는 것이었다. 오키나와 주민들의 생명, 재산은 당연히 안중에 없었다. 그들에게 오키나와 주민들은 일종의 방패막이였다.
14살 소년에게 총을 쥐어줬고, 총이 모자라면 죽창이나 수류탄을 쥐고 적진으로 돌진하게 했다. 미군이 점령하면 군사기밀이 노출될 것을 우려한 일본군은 주민들에게 “살아서 포로의 치욕을 당하지 말 것”이라는 수칙을 내세워 공포심을 자극했다. 실제 미군이 상륙하자 400명 이상의 주민들이 낫, 곡괭이, 돌 등을 이용해 서로를 죽이는 ‘집단 자결’ 사건을 일으켰다. 전쟁 당시 여러 가지 이유로 희생된 오키나와인은 주민의 4분의 1인 십수만명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된다.
오키나와 사람들에 대한 차별의 뿌리는 전쟁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류큐왕국이라는 이름으로 독립돼 있던 오키나와는 정치적·종교적·문화적으로 독립성을 유지했다.
그러나 1879년 메이지정부의 군대에 의해 일본에 합병된 이후, 류큐의 토착민들은 고유의 문화를 버리고 ‘일본인’으로 거듭나기를 강요받았다. 그러나 오키나와인들이 아무리 ‘일본인’이 되려 해도, 그들은 ‘2등 국민’을 벗어나지 못했다. 일본 본토의 식당에는 ‘류큐인, 조선인 출입금지’ 같은 안내문이 붙어 있곤 했다.
전쟁 이후엔 미군들이 오키나와의 평화를 깨트렸다. 미국은 이곳에 군대를 주둔시킨 뒤 1971년이 되어서야 일본에 주권을 반환했다. 물론 오키나와가 다시 일본땅이 된 뒤에도 미군기지는 그대로 남았다. 지금도 주일 미군기지의 75%가 오키나와에 있다. 오키나와에 주둔한 미군은 성폭행, 총기 사고 등 각종 문제를 일으켜 주민들의 공분을 샀으나, 사고 책임자에 대한 처벌은 매번 흐지부지됐다. 최근에도 미군은 사고 위험성이 높아 어느 곳에서도 주둔을 원치 않는 수직이착륙기 오스프리를 오키나와의 미 해병대 후텐마 비행장에 배치하려 해 주민들의 반발을 사고 있다. 일본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필요하긴 하지만, 정작 가까이 하기엔 골치 아픈 미군기지를 오키나와에 몰아넣은 것이다.
2000년 오키나와에서는 G8 정상회담이 열려 세계의 주목을 받았고, 이후에는 ‘치유의 섬’ 혹은 ‘슬로 라이프의 섬’이라는 이미지를 얻어가고 있다. 일본 내에서도 오키나와에 반해 그곳으로 이주하는 이들이 늘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저자는 이 같은 현상이 오히려 오키나와의 모순된 현실을 가린다고 본다. 기지 문제, 오키나와 전투 등 무거운 현실은 망각하고 문화, 예능, 풍속, 습관, 요리만을 즐기는 것은 또 다른 의미에서의 ‘폭력’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오키나와 남성들의 평균수명이 떨어지자 ‘장수의 섬’이라는 관광 이미지가 떨어진다고 우려하는 일까지 벌어졌다고 하니, 주객이 전도된 셈이다.
저자는 오키나와를 오키나와만의 문제가 아닌, 좀 더 넓은 시선으로 바라보자고 제안한다. 오키나와 문제는 미국의 군사 전략과도 맞물려 있기 때문이다. 오키나와 주둔 미군이 이라크, 아프가니스탄에 파병됐고, 한반도에 군사적 충돌이 일어나면 오키나와의 미군 해병대가 즉각 대응한다.
이 책은 제주도 출신 번역가가 옮겼고, 제주도의 지식인들이 추천사를 썼다. 그러고보니 탐라왕국과 류큐왕조, 4·3 항쟁과 오키나와 전투, 올레길과 ‘치유의 섬’, 제주 문화이민자와 일본 본토 출신 오키나와 이주자, 그리고 제주 해군기지와 오키나와 미군기지는 정말 기묘할 정도로 유사하다.
일본의 지도를 보면 본토의 규슈 남쪽 아래 쪽으로 대만에 이르는 1,300km 해상에 활처럼 연결된 200개에 가까운 섬을 발견할 수 있다.
그 중의 1/3이 사람이 사는 섬, 이곳이 바로 오키나와다.
하지만 원래부터 오키나와가 일본의 땅이었던 것은 아니다.
불과 400년 전만해도 일본의 모습은 지금과 상당히 달랐는데, 그 때는 훗카이도 역시 일본에 속하지 않았고 선주민인 아이누족의 세상이었다.
12세기부터 오키나와섬을 포함한 류큐제도에서는 몇 개의 집단이 세력을 다투다 1429년 통일국가인 "류큐왕국"이 탄생하게 되는데,
1609년, 아직 약소국이었던 류큐왕국은 일본 사츠마번의 침략을 받고 츠마번 군세 가문의 조공국이 된다.
곧 이어 명나라를 이어 들어선 청나라에도 굴복하여 조공을 계속하게 되었지만
사츠마번과 청나라 양쪽에 예속된 체제를 이어가면서도 독자적인 국가와 문화를 유지하기 위해 힘썼다.
그러다가 일본에 완전히 합병된 것은 메이지 유신 이후인 1879년.
하지만 일본에 정식으로 합병된 이후에도 일본은 오키나와에 거의 식민지 수준의 대우를 하게 된다.
일본이 류큐를 침략하는 과정은 조선 침탈과정과 비슷했는데
1879년 완전 합병에 앞서 1872년, 메이지 정부가 임의로 류큐를 번(藩)으로 바꿔버렸으며, 이듬해에는 외교권, 사법권을 빼앗고
고유언어를 금지시키고 일본어 사용을 강요하였으며, 본토의 일본인을 섬으로 이주시키는 등 사실상의 동화정책을 펼치게 된다.
시간이 흘러 1945년 4월 1일.
일본에게 극도로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던 태평양전쟁이 한창이던 때,
진주만 침략의 기세를 몰아 하와이 서쪽 바다까지 치고 나가던 일본이 미드웨이 해전 등에서 연패하면서 태평양전쟁의 무대는 서서히 일본 본토로 향하게 된다.
1945년 2월 10일 ,
일본의 패색이 짙어진 가운데 어전회의가 열렸다. 일왕과 군부 및 내각은 이미 전세가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음을 알고 있었다.
고노에 총리는 히로히토 일왕에게 진언했다.
“이제 일본의 패전은 불가피하기 때문에 화평의 결단을 해야 합니다.”
그러자 일왕은 “그것은 다시 한 번 전과를 올린 후에 해도 늦지 않겠는가! ”라고 반문하면서 항복을 거부하였다.
그렇게 세계2차대전의 승패가 보이기 시작하는 상황에서 일본은 미국과의 협상을 유리하게 끌어가기 위해 질 것이 뻔한 전쟁을 결정한다.
미군의 본토 상륙을 최대한 늦추고 군국주의 천황체제를 보존할 수 있는 시간을 벌기 위한 버리는 돌,
그것은 일본 본토가 아닌 속국 오키나와였기 때문이었다.
일본은 일본 본토방위의 준비가 완료될 때까지 오키나와 본섬의 요미칸, 차탄에 비행장을 만들고 미국과의 일전에 대비하였다.
때문에 미군 입장에서는 오키나와를 점령해야 일본 본토 침공의 발진 기지를 확보할 수 있었다.
1945년 3월 26일 새벽, 미군은 오키나와 본섬 동쪽에 있는 "게라마" 에 발을 디뎠다. 미일간 최대 지상전이 시작된 것이다.
4월 1일에는 오키나와 본섬 동해안에 상륙했다. 그로부터 약 3개월간 거대 병력 54만명의 미군이 류큐의 왕성옛터에 투입되었다.
이에 비해 일본 황군의 병력은 겨우 6만여명, 일제는 부족한 병력을 채우기 위하여 만 14세에서 70세까지의 오키나와 남성과 여학생을 전쟁에 강제 동원했다.
하지만 '철의 폭풍' 이라 불리는 이 전투는 처음부터 일본군에는 승산이 없는 무모한 전투였다.
세계역사상 유례를 찾을 수 없을 정도로 격렬하고 비참했던 오키나와 전투, 희생자 총 30여만명 중 류큐 주민이 22여만명, 미군이 약 1만 2천명,
일본군이 약 5만 5천명, 징용이나 종군위안부로 끌려온 한국인 약 1만명으로 군인보다 류큐 민간인 사상자가 훨씬 많았다.
일본군들은 미군이 공습을 시작해오자 한국인들에게 막대기를 하나 쥐어주며 적진으로 뛰어들게 했다고 한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항복하였다.
미군은 오키나와 본도 뿐만 아니라 그해 12월 류큐군도 남부의 미야코, 아에야마 제도를 점령하여 군정을 실시했고
이듬해 1월에는 류큐군도 북부인 아마미와 오시마 제도에 진주했다. 미군은 승자의 군대, 즉 점령군으로서 류큐군도를 일본 본토에서 분리시키고 이곳에 눌러 앉았다.
1948년 2월 히로히토 일왕은 멕아더 점령군 총사령관에게 오키나와에 대한 메시지를 보낸다.
미국이 오키나와의 주권을 일본에 남겨 두고, 조차하는 형식으로 25년 내지 50년 또는 그 이상 장기간 오키나와를 지배하는 것은 미국의 이익이 될 뿐만 아니라 일본의 이익도 된다는 메시지를 극동사령부에 전달하였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했을때 오키나와 내 미군기지가 전후 처음으로 타국 공격의 출격기지가 사용되었고, 이후 류큐는 태평양의 요석(keystone of Pacific)으로 불리며 전략 요충지로 중요성이 부각되었다.
1951년 샌프란시스코에서 전후 처리를 두고 미국과 일본이 강화조약을 맺었는데,
그 안에는 류큐를 미국에게 주고 일본은 독립국으로서 지위를 회복한다는 조건이 있었다.
결국 저열한 도마뱀 일본은 도마뱀꼬리 류큐군도를 잘라서 대머리독수리 미국에 내어 준 덕분에 몸체를 온전히 보전하게 되었다.
일본을 추방하고 류큐의 새 주인이 된 미국은 류큐인에게 많은 자치권을 주었다.
미군정은 의식적으로 ‘오키나와’란 일본식 용어 대신에 원래의‘류큐’를 쓰길 장려했으며 일왕의 연호사용을 금지했다.
류큐인은 일정기간의 자치 뒤에는 독립할 수 있다는 희망에 부풀었다.
1962년 사모아 독립에 이어, 1970년 피지와 통가 등 류큐보다 면적이 작고 인구가 적고 역사도 일천한 태평양상의 여러 군도들이 속속들이 독립국이 되어갈 무렵 ‘다음차례는 우리겠지’, 하며 류큐인의 꿈은 금방 이루어질 것 같았다.
그래서 1970년 7월 류큐 토박이인 다케히코를 중심으로 한 류큐의 독립지사들은 일본제국에 무력 점령되었던 옛 류큐 왕국을
류큐 공화국(琉球共和國, Republic of the Ryukyus)으로 되살려 명실상부한 독립국 수립을 최고강령으로 하는 ‘류큐독립당’을 창당하였다.
그러나 1972년 5월 15일, 미국의 일본에 대한 오키나와 반환은 류큐인에게는 청천벽력이었다.
그 후 류큐는 다시 ‘오키나와’로 불리게 되었고 일본 본토에서 오키나와로 가던 국제선은 국내선이 되었고, 미국식으로 우측에서 달리던 차량은 일본식으로 좌측으로 달리게 되었다.
삼성천양기, 오키나와 독립국의 국기다.
일본의 오키나와가 류큐 공화국으로 독립되는 날. 동북아는 새롭게 개편 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가능성이 없는 이야기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