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를 시작하며] 제주에 그림책미술관과 마을을 꿈꾼다

 

한라일보. 2012. 09.12. 00:00:00

 

작년부터 우리 도서관에서는 방학만 되면 이상한 현상들이 벌어진다. 자기 집 마냥 들이닥쳐서는 넉살좋게 터줏대감 노릇을 하는 친구들 대신 처음 보는 친구들과 엄마들로 활기가 넘쳐난다. 슬슬 장난기가 발동해 신원조회 과정을 거치다 보면 대부분 방학을 맞아 가족단위로 여행을 온 이들이다. 여행을 왔으면 관광지를 찾아다니는 것도 바쁠 텐데 웬 도서관? 여행 와서도 아이들에게 책을 읽혀야 직성이 풀리는 우리나라 극성 엄마들의 표본을 보는 것 같아 불편한 마음을 가지고 대화를 시도해 본다. 내용인즉, 방학을 맞아 한 달 정도 일정을 잡아 제주를 찾았다고 한다. 물론 아빠는 직장 때문에 일행에서 제외되고 엄마와 아이들만 생활하는 것이다. 일주일 이상 제주의 곳곳을 누비다 보면 지치기도 하고 더 이상 갈 데가 없단다. 아이들과 함께할 수 있는 문화관련 박물관이나 공원 같은 데를 찾아가도 특색이 없어 감흥을 느끼지 못한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이러한 연유로 온갖 안테나를 동원해 찾아온 곳이 우리 도서관이라는 것이다. 보잘 것 없는 작은도서관인데 뭐가 좋아서 찾아 오냐고 물어보면 공공도서관은 소란스러워 정신이 없고 자기 집 같은 도서관이 좋다는 것이다.

 

 재작년 엄청난 무리를 해서 유럽의 책마을, 동화마을, 도서관들을 한 달 동안 뒤지고 다녔던 기억이 새롭다. 이중 가장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 왔던 곳이 책마을과 동화마을이었다. 이곳의 공통점은 하나같이 쇠락해가는 산간오지 시골마을에 있다는 점이었고 있는 그대로의 시골마을 건축물을 이용해 조성했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불편함을 무릅쓰고 산간오지까지 찾아가는 이유는 세계 어디를 가더라도 흔하게 볼 수 있는 콘크리트로 도배한 고층건물들이 아니라 수 천 년의 역사를 간직한 벽돌집과 다듬어지지 않은 자연환경, 퀴퀴한 냄새를 풍기는 고서적과 동화속 주인공들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한국에도 유럽의 책마을 특히 영국의 헤이온웨이 책마을 견학하고 이런 마을 만들어보자고 의기투합해 만든 곳이 있다. 바로 파주 책마을이다. 그러나 이곳은 출판조합 차원에서 정부의 대대적인 지원을 받아 말 그대로 신도시를 건설한 것으로 내용과 형태가 매우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유럽의 경우에도 정부가 나서서 집중적으로 지원한 사례들이 있지만 한국처럼 논밭을 밀어버리고 대규모 신도시를 건설한 형태는 찾아 볼 수가 없다. 즉, 전후맥락이 완전히 다르다는 것이다. 유럽은 죽어가는 시골마을을 살리고 지역주민들의 풍요로운 삶을 되찾기 위해 책마을을 도입했다면, 한국은 도심의 비싼 임대료를 감당하면서 사업을 영위하기 어려웠던 한국출판산업 육성조치의 일환으로 정부가 싼값에 토지를 불하해준 산업지원책이었던 것이다. 지금은 처음의 떠들썩했던 분위기와는 달리 점차 일반인들의 관심에서 벗어나고 있는 현실이다.

 

 지금 제주는 자타가 공인하는 박물관과 공원 천국이다. 자고나면 새로 생겨나는 이런 시설물들을 보면서 항상 마음이 무겁다. 제주의 자연과 문화가 조화를 이루는 곳을 찾아보기 힘들다. 어디에서도 볼 수 있는 건축물로 도배를 하고 설립자가 추구하는 정신이 무엇인지 모르겠다.

 이제 뜻있는 그림책 작가들과 민간 작은도서관 운영자를 중심으로 새로운 바람이 일어나고 있다. 아이부터 어른들까지 누구나 공유할 수 있는 그림책이 중심이 되는 그림책 미술관과 그림책마을의 건립 움직임이다. 개인적으로 10년 가까이 구상해 오던 평생 바람이 이제 현실로 다가오니 행복할 따름이다. 내가 나고 자란 제주에 국내외 저명한 그림책 작가들의 원화가 전시되고 마을골목마다 그림책의 시큼한 냄새가 퍼져나가는 날이 곧 다가올 것이라 여겨진다. 문화란, 어느 하나를 쓸어버린 자리에 번듯하게 다시 들어설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시간을 요구하고 경험을 요구한다. 제주의 전통문화와 수만 년의 역사를 간직한 책이 결합되어 하나 되는 공간이 우리 제주에 태어나게 될 것이다. <임기수 설문대어린이도서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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